[중앙일보 전수진] 수업이 끝났다. 시계를 보니 8일 새벽 1시8분. 전날 오후 2시에 시작한 수업이 11시간 넘게 진행됐다.
연구할 시간이 모자란다며 20여 년간 학교에서 숙식을 해결해온 성균관대 시스템경영공학과 권철신 교수(64)의 마지막 학부 수업이었다.
정년까지 남은 2년 동안 박사과정 학생 지도와 연구에 몰두하기 위해 학부 강의를 그만두기로 했지만, 3학점짜리 과목의 마지막 강의에서 마라톤 수업으로 열정을 붙태운 것이다.
그가 아쉬운 듯 분필을 내려놓고 “자, 그럼 이제 마치겠습니다”라고 마무리하자, 학생들은 기립박수를 보내며 ‘스승의 은혜’를 합창했다. 노래가 끝나자 권 교수는 잠시 눈물을 훔치다 입을 열었다.
“더 이상 열심히 하지 못할 정도로 열심히 했습니다. 소임을 다했다는 생각에 홀가분합니다.”
그 자리에는 7명의 학부생뿐 아니라 권 교수와 함께 살다시피 하는 대학원생들과 이제는 40대가 된 두 제자, 그리고 연구실에 남편을 뺏긴 부인 하옥수씨도 함께했다.
11시간짜리 마라톤 강의라니, 이해가 되지 않는 점이 한둘이 아니다. 먼저, 첫째 질문. 왜 학부 강의를 겨울방학 기간인 1월까지 이어서 하는가? 간단명료한 답이 돌아왔다. “강의할 게 남아서 그렇습니다.” 그리고는 당연하다는 듯 덧붙인다. “강의는 제가 마치고 싶을 때 마칩니다.”그렇다면 두 번째 질문.
정년을 2년 남겨둔 나이에 11시간이나 강의를 이어갈 수 있는 힘의 원천은? “학생들입니다.” 옆에서 전정철 조교가 살짝 귀띔한다. “교수님은 오늘 수업을 위해서 며칠 밤을 새셨어요. 코피도 쏟았는데.”권 교수의 칼로 자르는 듯한 답변이 이어진다.
“많은 한국 대학에서는 학생이 교수의 ‘밥’입니다. 그러나 교수의 존재 가치는 교육으로 인물을 만들어내는 데 있다고 봅니다. 게다가 자원빈국인 한국이 가진 것은 사람뿐이니 교수가 인물을 길러내는 것은 나라를 위해서도 참으로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니 수업과 연구 지도를 철두철미하게 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그는 정년이 없는 일본의 몇몇 사립대의 스카우트 제의를 받고 올해 명예퇴직을 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예기치 못한 일이 터졌다. 석사를 마치는 학생 전원을 비롯한 7명이 박사과정에 합류하겠다고 밝혀온 것이다.
차마 그들을 두고 떠날 수 없어 ‘입실수도(入室修道)’로 불리는 연구실 숙식생활을 정년 때까지 계속하기로 했다.
권 교수는 일반인에게는 조금 생소한 ‘R&D(Research & Development: 연구·개발) 공학’ 분야의 개척자다. 기업의 연구개발 시스템을 평가하고 구축하여 경쟁력을 키우는 것이 이 학문의 목적이다.
일본 도쿄공업대 유학 시절 이 학문을 처음 접한 그는 이 분야를 개척하기 위해 이제껏 학생들과 고군분투해왔다.
그런 노력의 하나가 권 교수를 유명하게 한 ‘한계돌파 지옥세미나’다. 4주 일정의 세미나는 특별강의 9회(18시간), 어학연수 31회(62시간), 정신수련 14회(14시간), 정신강론 2회(6시간), 세미나 63회(126시간)으로 이뤄졌다.
야외 체육단련 6회(28시간)까지 따지면 그야말로 심신을 모두 수양하는 초특급 훈련이다. 권 교수와 석박사 과정 학생들이 20년 이상 매년 여름방학 때마다 이 과정을 열어왔다. 11시간을 넘겨 진행된 이날의 마지막 학부강의도 권교수의 기준에 맞추어보면 유별날 것도 없는 셈이다.
권 교수에겐 아픔이 하나 있다. 전공인 ‘R&D공학’이 한국에선 학과조차 개설되어 있지 않아서다. 일본에서는 60년대 중반 관련 학과들이 개설돼 지금도 왕성한 교육·연구를 하고 있다고 한다.
그는 “연구개발을 위해선 이를 위한 시스템이 절실하다”며 “각 대기업의 임원들을 위해서라도 학과가 개설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실제로 이 학문의 수요는 상당히 많다.
그는 지금까지 삼성전자와 제일모직과 같은 기업에서부터 한국산업개발연구원, 교육인적자원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곳의 자문에 응하고 현장 지도를 해왔다.
권 교수는 “학부 강의는 더이상 하지 않겠지만, 대학원생 지도와 연구, R&D공학과 개설 시도, 그리고 기업 R&D시스템 자문에 응하는 것까지 할 일이 많다”고 말했다.
아무래도 편히 쉴 팔자는 아닌 모양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래서 그는 행복하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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